나는 백제문화권에서 나고 자랐는데... 옛 가야 땅에 자리잡게 되었다.
딱히 얄궃은 운수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어떤 가르침이 내 생에 새겨질지 기대 반 근심 반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로부터 출발한 내게
신라 향가를 전공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몹시 싫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향가를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백제로부터 충동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느낌 탓일까?
(드디어 <향가의 땅> 블로그에 향가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백제 성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을 결합시킨 이미지, 상징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 흔적이 한 세대 뒤의 무왕을 통해 익산 미륵사지와 후기신라 백제문화권의 서동설화에 다소나마 남아있다.
백제 건국 이야기는 전혀 싱화적이지 못한데, 오히려 멸망에 가까운 시점이 신화적으로 표현된다.
백제의 아이러니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논문에도 썼듯이 백제는 여성시조, 여성건국영웅을 지닐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고전문학 속의 여성 캐릭터가 뒤틀린 건 맥제 건국영웅 이야기로부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성영웅들이 그 모양일까...?
아무튼 성왕에서 무왕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교섭은 중요하며
바로 이 시기 현존하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향가인 <혜성가>가 출현한다.
그리고 훗날 이 시기를 배경으로 백제문화권의 서정주체들은 <서동요>를 소환(?)한다.
무왕과 진평왕의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섭이 신라 향가사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상사학계에서는 '백제불교의 동점' 등을 중심으로 이 시기 백제와 신라의 상호 텍스트적 문화교류를 거론하기도 한다.
누차 주장했지만 속요의 지역색은 백제가요로부터 연원하여
<만엽집> 등의 백제인 작가-여성화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신라 향가는 그에 비하면 경주 일대의 남성 중심이며, 사랑보다는 죽음과 소멸이라는 종교적 주체에 침잠하였다.
이 종교적 주제의 연원이 그 무엇이었건 간에(무속이건 풍류건) 현존 자료들은 '불교의 겉옷'을 걸치고 있다.
그런데 이 '불교의 겉옷'이 '백제불교의 동점'에 따른 유산이라면?
내가 향가를 통해 보고싶었던 것은 여기서 자명해진다.
그리고 향가와 속요를 서로 이으면서도 가르는 지점도...
의상의 <추동기>에 드러난 화엄일승의 언어인식은 원효의 화쟁과는 너무 도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달랐다.
그 차이는 향가의 언어와 불교적 수사법 사이의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7세기의 신라는 백제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새롭게 표현한다.
그 자부심의 표출이 "향가"인 셈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것이
'1) 인물-의경'의 상호작용과 '2)시간-공간의 재해석', '3)신화적 사유의 재창출' 등이다.
8세기의 향가는 이를 토대 삼아 현존 자료만 보아도 눈부신 성과를 거둔다.
그것은 2인칭 수신자를 1인칭 화자로 전이시키는 서정주체의 탄생이다.
그 과정에서 1)은 '성자' 형상의 구축을 통해 드러나는데, 그 과정에서 한 백제계 승려의 입전 과정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승려의 이름은 진표인데,
(눈이 아파 더 쓸 수가 없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마저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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