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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굼벵이 매미가 되어 - 나의 민연시절

by 不岳 2012. 9. 3.

 굼벵이 매미가 되어

 

서철원(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민연을 떠나기 무섭게 나의 민연 시절을 쓰란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하던 일에 여전히 분주하신 선생님들과 선후배님들께 부디 누를 끼치지 않길 바라며 몇 자 적는다. 재작년 어느 날 지하실에서 시조와 씨름하다보면 이런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굼벵이 매암이 되야 나래 돋혀 솟아 올라

높고 높은 나무에 소리는 좋다만은

그 위에 거미줄 쳤으니 그를 저어 노라.

(표기는 󰡔악부󰡕 고대본을 따르되 현대어로 윤문함)

 

대학원생은 매미를 꿈꾸는 굼벵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석사과정에는 석사논문 쓴 사람을, 석사는 박사과정 수료하고 강의하는 이들을, 수료자는 박사를, 박사는 전임교수를 매미인 줄로 알고 또 그렇게 바라보며 견디기 마련이다. 어느 단계나 늘 거미줄이 도사리고 있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미가 되어 떠난 듯싶지만 민연 시절을 그리워하는 선배들이 여럿 있었다. 그 그리움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이며, 왜 생겨나는 걸까? 이 문제를 마지막에 다시 생각해 보겠다.

세기말 IMF가 터진 즈음, 막 나온 석사논문 몇 권을 들고 논문 돌리러 민연을 찾았다. 학부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그때는 석사과정은 공부를 맘껏 하라고 민연에 재직시키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논문을 들고 간 그 자리에서 나는 민연 문자코드연구센터의 연구원이 되었다. 당시 선배와 오갔던 말을 그대로 적어 본다.

 

철원아, 민연에서 일할 생각 있니?”

이제 막 논문 썼으니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 생각 잘 해보고 다음 주부터 출근해라.”

 

다달이 적어 내는 24단위 근무계획표에 따라 매일 출퇴근부를 찍으며 일하면 6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았다.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반년을 모으면 당시 한 학기 등록금과 비슷한 액수였다. 나는 공부를 본업으로, 민연 일을 부업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들을 하나로 화쟁(和諍)시키지 않는 이상, 공부와 민연 일의 병행 - 같은 성격의 일을 하더라도 전자를 연구’, 후자를 사업이라 부른다. - 은 자전거를 타고 자갈밭을 지나며 신문을 읽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훗날 시조DB 일을 하면서 그래도 전공 관련 텍스트를 본다는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그때 그 시절은 월급도둑 소리를 들어도 대꾸를 못할 정도로 무능해서 부원장님께 걱정도 많이 듣곤 했다. 그래도 함께 일한 두 분 선배님들의 이해와 다그침 덕택에 무사히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몇 년간 일신의 사정으로 공부를 접고 민연도 떠나야 했다. 평생 달고 살 지병을 얻고 부친상을 당한 다음, 병역도 치르고 신용불량자도 되었다가 다른 기술을 배우러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준비한 박사논문이 온전할 리 없었지만, 낡은 데스크탑으로 내 전공의 역사를 띄엄띄엄 정리하며 언젠가 돌아갈 자리를 생각했다. 그럴 때면 가난과 병에 찌들어가는 내 영혼에서 기쁨인지 설움인지 모를 것들이 솟아나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곤 했다.

2005년 가을, 돌아와 보니 지도교수님은 부원장에서 원장이 되셨고, 같은 방에 계셨던 두 분 선배님들은 모교와 교원대의 전임이 되셨다. 못 보던 얼굴들이 제법 늘어난 건 반가웠지만, 함께 대학원과 민연을 다니며 공부했던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몇 명쯤은 그새 박사가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특히 혈육과도 같았던 한 선배가 공부를 아예 접었다는 소식이 의외였고, 그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어 더욱 안타까웠다. 아무튼 돌아온 후로 시조DB일을 돕는 한편 학위논문을 쓰고, 선임연구원이 되었다가 연구교수가 되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곱씹었다.

 

다시 민연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게 되었구나.”

 

이 사실 하나가 주는 감격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민연 원장실은 내겐 성지(聖地)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 자리에서 박사논문 심사를 마쳐서이기도 하지만, 논문이 통과된 순간 창문 저편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 미소를 보고 그저 기가 막혔다. 그 먼 세상에서 아들이 박사 되는 걸 보러 오셨더란 말인가촌스러운 눈물이 흘렀다.

그 후로 몇 달간 어문학DB 일을 했던 적도 있지만 주로 시조DB실에 머물렀다. 시조DB는 학진 토대연구 지원을 받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시도했으나 선정되지 못했던 과제였다. 그러던 것을 내가 제안서 기획에 참여하여 2007년에 비로소 3년 기한으로 과제가 선정되었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기뻐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완성할 시조DB에는 원장님과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원 등 여러 선생님들께서 각각 다른 빛깔로 이루어 온 시조에 대한 을 실어야 했다. 온갖 빛깔의 꿈들을 보고 느끼며 후배 연구자로서 탄복하고 숙연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사인 내가 그 꿈들을 공존시킬 장()을 본격적으로 마련할 역량과 책임을 끝내 갖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했던 연구사업의 화쟁을, 나는 끝내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그저 제안서의 약속에 따라 연차보고서에 들어갈 내용을 꾸려가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었을 뿐, 시조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 창출할 계기를 만들겠다는 열정을 지닐 만한 여유와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학진의 지원이 종료된 뒤에도 오로지 시조에 대한 만으로 여러 선생님들과 후배들이 이 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있으니,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뭐라 말하기 어렵다.

과제 종료를 몇 달 남기고 경남대학교에 임용되어 그 인연을 다했지만, 뭔가 민연에 두고 온 것이 있다는 느낌은 프로젝트의 사후 처리가 남아서만은 아닐 게다. 처음 거론했던 굼벵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매미를 떠올려 본다. 빈말로라도 매미를 바라며 산 민연 시절을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공부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거의 없어도 공부를 사랑하지 않는 연구자는 없듯이, 민연 시절이 그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구와 사업 사이에서 긴박한 줄타기를 했던 그 생활은 이상(李霜)<거울>이 보여주는 이중주(二重奏)를 닮았다.

민연에서의 외로된 사업이 아니었던들 공부를 더 많이 했겠지만, 민연이 아니었던들 내가 공부 자체를 계속할 수 있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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