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벵이 매미가 되어
서철원(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민연을 떠나기 무섭게 ‘나의 민연 시절’을 쓰란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하던 일에 여전히 분주하신 선생님들과 선후배님들께 부디 누를 끼치지 않길 바라며 몇 자 적는다. 재작년 어느 날 지하실에서 시조와 씨름하다보면 이런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굼벵이 매암이 되야 나래 돋혀 솟아 올라
높고 높은 나무에 소리는 좋다만은
그 위에 거미줄 쳤으니 그를 저어 노라.
(표기는 악부 고대본을 따르되 현대어로 윤문함)
대학원생은 매미를 꿈꾸는 굼벵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석사과정에는 석사논문 쓴 사람을, 석사는 박사과정 수료하고 강의하는 이들을, 수료자는 박사를, 박사는 전임교수를 ‘매미’인 줄로 알고 또 그렇게 바라보며 견디기 마련이다. 어느 단계나 늘 ‘거미줄’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미가 되어 떠난 듯싶지만 민연 시절을 그리워하는 선배들이 여럿 있었다. 그 그리움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이며, 왜 생겨나는 걸까? 이 문제를 마지막에 다시 생각해 보겠다.
세기말 IMF가 터진 즈음, 막 나온 석사논문 몇 권을 들고 논문 돌리러 민연을 찾았다. 학부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그때는 석사과정은 공부를 맘껏 하라고 민연에 재직시키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논문을 들고 간 그 자리에서 나는 민연 문자코드연구센터의 연구원이 되었다. 당시 선배와 오갔던 말을 그대로 적어 본다.
“철원아, 민연에서 일할 생각 있니?”
“음… 이제 막 논문 썼으니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 생각 잘 해보고 다음 주부터 출근해라.”
다달이 적어 내는 24단위 근무계획표에 따라 매일 출퇴근부를 찍으며 일하면 6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았다. 먹지 않고 쓰지 않고 반년을 모으면 당시 한 학기 등록금과 비슷한 액수였다. 나는 공부를 본업으로, 민연 일을 부업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들을 하나로 화쟁(和諍)시키지 않는 이상, 공부와 민연 일의 병행 - 같은 성격의 일을 하더라도 전자를 ‘연구’, 후자를 ‘사업’이라 부른다. - 은 자전거를 타고 자갈밭을 지나며 신문을 읽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훗날 시조DB 일을 하면서 그래도 전공 관련 텍스트를 본다는 게 어찌나 다행이던지… 그때 그 시절은 월급도둑 소리를 들어도 대꾸를 못할 정도로 무능해서 부원장님께 걱정도 많이 듣곤 했다. 그래도 함께 일한 두 분 선배님들의 이해와 다그침 덕택에 무사히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몇 년간 일신의 사정으로 공부를 접고 민연도 떠나야 했다. 평생 달고 살 지병을 얻고 부친상을 당한 다음, 병역도 치르고 신용불량자도 되었다가 다른 기술을 배우러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준비한 박사논문이 온전할 리 없었지만, 낡은 데스크탑으로 내 전공의 역사를 띄엄띄엄 정리하며 언젠가 돌아갈 자리를 생각했다. 그럴 때면 가난과 병에 찌들어가는 내 영혼에서 기쁨인지 설움인지 모를 것들이 솟아나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곤 했다.
2005년 가을, 돌아와 보니 지도교수님은 부원장에서 원장이 되셨고, 같은 방에 계셨던 두 분 선배님들은 모교와 교원대의 전임이 되셨다. 못 보던 얼굴들이 제법 늘어난 건 반가웠지만, 함께 대학원과 민연을 다니며 공부했던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몇 명쯤은 그새 박사가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특히 혈육과도 같았던 한 선배가 공부를 아예 접었다는 소식이 의외였고, 그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어 더욱 안타까웠다. 아무튼 돌아온 후로 시조DB일을 돕는 한편 학위논문을 쓰고, 선임연구원이 되었다가 연구교수가 되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곱씹었다.
“다시 민연에서 연구자로 살아가게 되었구나.”
이 사실 하나가 주는 감격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민연 원장실은 내겐 성지(聖地)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그 자리에서 박사논문 심사를 마쳐서이기도 하지만, 논문이 통과된 순간 창문 저편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 미소를 보고 그저 기가 막혔다. 그 먼 세상에서 아들이 박사 되는 걸 보러 오셨더란 말인가… 촌스러운 눈물이 흘렀다.
그 후로 몇 달간 어문학DB 일을 했던 적도 있지만 주로 시조DB실에 머물렀다. 시조DB는 학진 토대연구 지원을 받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시도했으나 선정되지 못했던 과제였다. 그러던 것을 내가 제안서 기획에 참여하여 2007년에 비로소 3년 기한으로 과제가 선정되었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기뻐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완성할 시조DB에는 원장님과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원 등 여러 선생님들께서 각각 다른 빛깔로 이루어 온 시조에 대한 ‘꿈’을 실어야 했다. 온갖 빛깔의 꿈들을 보고 느끼며 후배 연구자로서 탄복하고 숙연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사인 내가 그 꿈들을 공존시킬 장(場)을 본격적으로 마련할 역량과 책임을 끝내 갖지 못하여 못내 아쉽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했던 ‘연구’와 ‘사업’의 화쟁을, 나는 끝내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그저 제안서의 약속에 따라 연차보고서에 들어갈 내용을 꾸려가는 것에만 주안점을 두었을 뿐, 시조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 창출할 계기를 만들겠다는 열정을 지닐 만한 여유와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학진의 지원이 종료된 뒤에도 오로지 시조에 대한 ‘꿈’만으로 여러 선생님들과 후배들이 이 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있으니,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뭐라 말하기 어렵다.
과제 종료를 몇 달 남기고 경남대학교에 임용되어 그 인연을 다했지만, 뭔가 민연에 두고 온 것이 있다는 느낌은 프로젝트의 사후 처리가 남아서만은 아닐 게다. 처음 거론했던 굼벵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매미를 떠올려 본다. 빈말로라도 매미를 바라며 산 민연 시절을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공부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거의 없어도 공부를 사랑하지 않는 연구자는 없듯이, 민연 시절이 그립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연구와 사업 사이에서 긴박한 줄타기를 했던 그 생활은 이상(李霜)의 <거울>이 보여주는 이중주(二重奏)를 닮았다.
“민연에서의 외로된 사업이 아니었던들 공부를 더 많이 했겠지만, 민연이 아니었던들 내가 공부 자체를 계속할 수 있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