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2006 박사학위 받기까지
00_1997.08 <일목대왕의 철퇴> 작품론 (학부 졸업논문).
- 원본 파일이 유실되었다. 신채호와 궁예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조만간 단편 논문으로 remake해서 신채호와 계몽기 연구의 기틀을
마련할 예정이다.
01_1999.06 균여의 작가의식과 <보현시원가> (석사논문).
- 사상사 논저를 전혀 집어넣질 못해서 여러 모로 아쉬움도 컸지만,
때론 아쉬움이 훗날을 위한 동력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02_2001.02 <보현시원가>의 수사방식과 사상적 기반 (한국시가연구9).
- 2000년 12월 2일 한국시가학회(단국대) 발표문. 학회에 데뷔한 글이다.
석사 논문에서 채 하지 못했던 내용의 remake. 훗날 박사 논문의 마지막 장에
포함된다.
03_2001.08 신라 향가의 소멸 모티프와 죽음 인식 (우리문학연구14).
- 박사 논문의 초안 성격이다. 이때는 죽음 인식에 대한 애송이 특유의 동경이랄까,
겉멋이 들어 있었다. 이 무렵부터 주제론과 수용미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04_2001.08 <원왕생가>에 나타난 종교적 서정과 신앙의 성격 (한국언어문화20).
- 03의 글 가운데 한꼭지를 심화시켜서 박사논문의 한 장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 글은 지금의 시각과는 전혀 통하지 않아서,
박사 논문은 물론 저서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05_2002.02 <항순중생가>의 방편시학과 <보현시원가>의 배경 (우리문학연구15).
- 신라 향가를 파들어가는 게 신통칠 않다보니 다시 <보현시원가>를 선택한 꼴이다.
이 글은 02와 합쳐져 박사 논문에 녹아들었다. 이후 부친상을 당하고 군대를
다녀오며 몇 년간 휴지기에 접어든다.
06_2005.12 <우적가>의 골계와 <처용가>의 관용 (국어문학40).
- 2005년 10월 21일, 제대 직후 국어문학회(전북대) 발표문.
발표 당시에는 어석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도 좀 보일까 했지만, 결국 그냥
작품의 전승담만 비교한 셈이다. 인접한 시기의 작품끼리 비교해서 향가의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박사논문의 취지를 처음 내세웠다.
07_2006.02 <서동요> 전승의 형성과 사상적 배경 (고시가연구17).
- 다 지난 일이지만 심사자 한 사람 때문에 고전문학회에서 12의 논문을 투고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12의 글을 쓰고 그 일부분을 바탕으로
심화시킨 글임에도, 이 글이 먼저 나오게 되었다. 신라인의 시각에 의해 백제의
영웅상이 폄하되는 과정을 역사와 설화 모두를 고려하여 풀이했다.
08_2006.04 신라 중대 향가에서 서정성과 정치성의 문제 (어문논집53).
- 2005년 11월 5일 민족어문학회(단국대) 발표문. 박사논문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09_2006.05 <풍요><원왕생가>의 수용자와 향가의 시적 자아 (한국시가연구20).
- 향가와 미술사의 관련 샹상에 처음 주목하고, 향가의 시적 자아를 그 수용자까지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는 7세기 향가사와 관련한 두 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여기에
사상사까지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24와 43에서 하고 있다. 더 할 수 있을런지...?
10_2006.06 신라 향가의 서정주체상과 그 문화사적 전개 (박사논문).
- 박사 논문이 나왔다. 여전히 뻑뻑하지만 이런저런 게릴라적인 시도를 했다는 데
위안을 삼는다. 이때만 해도 향가에 대해서는 절필하려는 뜻이 컸다. 고생이
심해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한 줄을 깨달아서였다.
11_2006.08 나말여초 향가의 지속과 변모 양상 (우리문학연구20).
- 2006년 4월 8일 우리문학회(경희대 수원) 발표문. 박사 논문 나오기 직전이라
주장에 크게 다른 맛은 없다. <찬기파랑가> 작품 분석이 썩 만족할 만하게
나왔다.
12_2006.12 진평왕대의 <혜성가>와 <서동요> 비교 (고전문학연구30).
- 사실은 2006년 말에 쓴 글로 박사논문의 첫 장을 이루는데, 심사가 오래 걸려
박사논문보다 늦게 나오게 되었다. 박사과정생이 기존과 다른 방법론과 시각을
갖추고 학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요즘에도 참 어렵다.
* 총 13건 : 학위논문 3, 단편논문 10.